Work is Worship

월요일을 두려워하지 말자

하나님 사랑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의 영광 됨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구약의 하나님, 신약의 하나님, Bible Study로 구성됩니다

사람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 사랑으로
열매 맺는 곳입니다.
인간이해와 상담, Self Interview, 일상생활(사진, 영상)으로 구성됩니다.

교회 사랑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신
사람과 교회를 사랑하는 곳입니다.
초보목사 칼럼, 사역나눔, 리더십, 설교영상, 예화, 도서소개로 구성됩니다.

요셉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때가 온 것처럼
우리 청년의 때에도 하나님의 때가 마침내 올까요?
습관이나, 슬로건이 아닌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는 날이 올까요?


그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아니오.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책추천]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에게 왜 복음이 필요한가?_윌리엄 윌리몬

  “참호 안에는 무신론자가 하나도 없다“ 신드롬 : 
  기독교란 온갖 것을 시도해 보았다가, 이제 극도의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시도’해 보기로 결심하는 비참한 사람의 마지막 소망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나를 난감하게 만든다.(p.25)

  1. 당신에겐 문제가 있다. 2. 그리스도가 답이시다. 3.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p.35)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먼저 와야 한다. 도덕주의 설교의 문제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해야 한다고 여기는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셨고, 행하실 것이고, 행하고 계신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당신에겐 문제가 있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 구원 도식의 문제점은, 이것이 우리, 곧 우리의 문제, 우리의 필요, 우리의 감정, 우리의 신념에서 시작하고 하나님에 대해 망각한다는 점이다.(p.51)

  세례란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는 어떤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어떤 일이다. 하나님의 주도하심으로 우리는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가족에 편입된다. 따라서 세례는 일종의 입양 의식이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물의 상속자들이라는 공적 표식이다…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의 자녀라고 주장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전에 그 분은 우리를 믿으신다.(p.54)

  전통적 설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두 발로 딛고 서도록 허락받기 전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말한다. 전통적 설교는,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한다. 반면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에는 ‘만약’이 전혀 없다.(p.56)

  칼 바르트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죄인들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스도인들만? 바르트가 했던 이 말의 의미는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는지 아는 사람들만이 자신이 그 사랑을 얼마나 배신했는지 인식할 수 있다는 뜻이다.(p.60)

  덴마크의 위대한 기독교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어디선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망각, 우리가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간과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 대부분에게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행하거나 행하지 않은 것, 혹은 우리가 느끼거나 느끼지 않은 것 혹은 믿거나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롬8:1, 14-17, 31, 33, 35, 37).(p.67)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한 가지 요소가 자유라면, 다른 하나는 자발적인 위험 감수다.
  훌륭한 부모가 맡은 책무의 일부는 자기 자녀가 위험을 감수하도록, 주제를 넘어선 어리석은 위험이 아니라, 인생의 성장과 충만함을 위해 필요한 위험을 감수하도록 다독이고 도와주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안전한 항구나 요새 섬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손짓하셨듯이, 예수님은 항상 우리에게 미지의 새로운 영역으로 오라고 손짓하면서 ‘우리보다 앞 가’신다.(p.92)

  성숙한 믿음에는 ‘나’에서 ‘너’로, 이기심에서 이타심으로 가는 저 긴 여정이 수반된다. 성숙한 믿음의 깊이와 대비되는 아이 같은 믿음의 충동적 특성을 주목하고 있다(엡4:14-15). 성숙한 믿음 vs. 어린 믿음(p.95)

  기독교가 훌륭한 종교인 한 가지 이유는, 다른 여러 세계 종교와 달리, 기독교는 고통일랑 전혀 없고 행복과 기쁨만 가득한 삶을 우리에게 약속하지 않는다는 점이다.(p.97)

  사소한 단어 ‘감사’는 그 울타리 안에 우주를 담고 있다.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은 언제나 무언가가 선물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 선물이 좋다고 인정하는 것이고, 또한 선물을 주는 이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말과 삶과 말로 표현된 감사이다.(p.118)

  주의 만찬 혹은 성만찬(‘감사’)은 기독교 예배의 중심 행위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성만찬을 제정하셨고 계속 이렇게 하라고 우리에게 요청하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성만찬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진 일에 대한 감사, 곧 빵과 포도주, 기도와 노래로 드리는 우리의 응답이기 때문이다. 
  폴 틸리히가 “감사는 성별이다. 감사는 세속적 세계에 속한 어떤 것을 거룩한 영역으로 옮겨 놓는다.”(p.130-131)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지키는 사람과 주는 사람을 대조한다.
  가장 널리 퍼진 오해는, 주는 것이란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 빼앗기는 것, 희생하는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주된 성향이 비생산적인 사람들은 주는 것이 빈곤해지는 것이라고 느낀다.
  생산적인 인물들에게,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주는 것은 역량의 최고 표현이다. 주는 행위 자체에서, 나는 나의 힘, 나의 부, 나의 능력을 경험한다….나는 넘쳐흐르고, 소비되고, 살아 있고, 따라서 즐거운 나 자신을 경험한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훨씬 즐겁다. 주는 것은 박탈이 아니고, 주는 행동 속에 내가 살아 있다는 표현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p.149)

  교회가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교회가 그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엘리엇(T.S.Eliot)이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왜 교회를 사랑해야 하는가? 우리는 왜 교회의 법을 사랑해야 하는가? 교회는 우리에게 삶과 죽음에 대해, 또한 우리가 잊을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말해 준다. 교회는 우리가 강경할 수 있는 곳에서 유연하고, 우리가 유연해지고 싶은 곳에서 강경하다. 교회는 우리에게 악과 죄를 비롯한 다른 꺼림직한 사실들에 대해 말해 준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를 싫어한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성장하라고 요청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이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전제한다. 교회는 인간이 성장이 일주일 안에 끝나지 않는 길고 힘든 여정이라고 단언한다. 성장에는 일생 전체가 필요하다.(p.162)

  믿음은 의심이 전혀 없는 확실성이라기보다는 “의심 한가운데서의 확신”이다. 믿음은 우리가 내디뎌야 할 발걸음을 죄다 말해주는 상세 지도가 아니라, 올바른 방향을 지시해 주는 나침반을 갖고 떠나는 여행이다.(p.178) 

차례.
 1. 당신에게는 문제가 있다.
 2. 사람들의 무릎 꿇리기
 3. 자기 두 발로 서기
 4. 기독교는 미숙한 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5.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을 위하여
 6. 모든 복의 근원이신 분
 7. 많이 받은 자
 8. 다수의 힘
 9. 장성한 사람을 위한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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